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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책의 정신
2022-06-30 10:17:54


우리는 고전을 어떻게 만들고 소비하는가?

고전을 만든 시대와 사람에 관한 진실파헤치기

이 책의 제목이 왜 '책의 정신'인지 모르겠다. '정신'이라기 보다는 '사실' 이라던가 '정정'에 가까운 내용들이었다. 부제인 '세상을 바꾼 책에 대한 소문과 진실'이 본문의 내용들을 더 잘 표현해주고 있다.

뒷표지 문구를 보면 '고전'에 대한 새로운 진실을 알려주는 책인 것 같아서 기대했는데 본문에 언급되는 책들 중 '고전'이라 할 만한 책은 별로 없다. 고전이라고 부를 만한 책들에 대한 기준이 나와 달라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제목에 대한 의아함과 추천문구에 대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들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익숙하게 알려진 책과 그 책의 내용들이 사실은 왜곡되고 편협하고 의도적인 산물이었다는 프레임의 전환은 분명 중요한 포인트였다.

초판과 개정판의 가장 큰 변화는 2013년이 아니라 2022년이라는 출간 시기이다. 기본적인 내용이나 이야기 전개의 틀은 초판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문장을 다시 한번 더 고쳤다. 그 과정에서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이터를 업데이트했다. 그 점이 가장 중요한 개정 내용이다. (p. 4)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렇다.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렇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인간은 변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 많이 알면 알수록 풍요롭고 여유 있는 삶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제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이다. (p. 5) -들어가는 말 中-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다. 유명한 책이 사실은 그 정도의 가치가 없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치있는 책으로 알려지게 되었나를 다른 책들과 비교대조하여 정정해주는 책이다. 따라서 참고자료로서의 다른 책들이 무수히 필요하다. 저자는 '메타북'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이 이 책을 쓰며 읽었던 메타북들을 소개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책을 자주 읽는데 한 권의 역사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다른 참고자료들이 무수히 필요하곤 했었기에 '메타북'의 중요성에 백퍼 동의한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책 한권 제대로 읽는 데는 더 많은 메타북들이 필요한 법이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지식의 세계에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읽어야 할 책의 세계는 확장되어 간다.

책은 다섯 가지의 주제로 이야기되고 있다. '포르노소설과 프랑스대혁명' '과학혁명과 읽히지 않는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싱거운 논어' '본성과 양육의 갈등' '책의 학살' 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이중에서 '본성과 양육' 의 학자간 입장 차이에 대한 변화를 다룬 내용은 이 책에서 가장 분량이 긴 부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입장정리가 어려운 부분이기도 했다. 그에 비해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는 짧고 굵게 아~! 하고 새롭게 배울 수 있었다.

이런 배움의 과정이 없었다면 프랑스 대혁명은 평등이라는 낱말에 깊은 의미를 담지 못했을 것이며 정치적 성과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을 전공한 문화사학자인 린 헌트는 그런 공감이 인권을 발명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을 만들어주었다고 설명한다. 그 배경에 음란한 소설의 독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권의 발명에 특별히 영향력을 발퓌했던 세 권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소의 <신 엘로이즈> 그리고 영국작가 리처드슨의 <파멜라> 와 <클라리사 할로> 이다. 세 작품은 모두 서간문으로 쓰인 연애소설이다. (p. 36)

중세말이라고 해야하나 근대초라고 해야하나 여하튼 프랑스대혁명 이전 시기에 사람들은 연애소설에 깊이 공감하며 열광했고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계몽학자들도 당대에 인기있던 그런 연애소설들을 많이 발표했다. 그래서 '포르노소설이 프랑스대혁명을 일으켰다' 라는 문장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을 저자는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통해 뒷받침한다. 당시에 일상적으로 읽히던 연애소설이 당대 사람들에게 평등의식을 고취시키던 공감의 소설이 지금은 포르노소설로 불리며 언제부턴가 배척되고 평가절하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를 보면 포르노그래피라는 개념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p. 41)' 자연스러웠던 것이 부자연스러워지게 된 배경에는 항상 권력과 통제가 있었다. '국가권력은 왜 포르노그래피를 부정하는가? (p. 55)' 라는 저자의 질문은, 쾌락의 가치를 부정하고 노동의 가치에 집중시키려는 의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혁명의 시작을 대표하는 저작물로 꼽힌다. (중략)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아무도 읽지 않은 책' 그리고 '역사상 가장 덜 팔린 책'으로 꼽힌다. (p. 78) 가장 큰 이유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p. 79)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관측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 했다. 그 본격적인 작업의 결과가 <두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였다. 이 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일반인도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쓰였다. 그것도 라틴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로! 학술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속어로 썼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p. 89)

저자는 갈릴레오에 대한 이야기들이 사실은 '상당부분 영웅화되었으리라고 봐야 한다. (p. 109)' 라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뉴턴의 <프린키피아> 도 설명한다. 뉴턴은 '뻔한 사실을 그대로 알아볼 능력도 없어 보이는 (p. 115)'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이론이 부정당하는 경험을 한 이후 <프린키피아>는 일부러 어렵게 썼다고 한다. 너무 어려운 책이었기 때문에 일반인을 위한 해설판이 필요했는데 이 해설판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먼저 등장했고 이후 프랑스 과학은 영국을 앞서기 시작한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프랑스어판의 표준으로 쓰인다는 이 해설판을 쓴 사람은 '볼테르의 애인이었던 에밀리 뒤 샤틀레라는 불세출의 여성 과학자 (p. 117)' 이다. 하지만 그녀는 갈릴레오처럼 영웅화되지 못했다. 영웅화는 커녕 그 이름조차 생소하다.

당대에 새로운 이론에 대해 세상에 알려야 겠지만 읽히면 위험하기에 많이 읽히지 않도록 어렵게 쓴 책들, 그 책들을 대중화하기 위해 해설판을 쓴 사람들, 하지만 너무나 다른 결과들을 보며 읽고 읽힌다는 것은 다시한번 지배논리와 권력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누가 무엇이 읽혀지길 바라는지 생각해 보며 읽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망각하고 읽고 있는게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니다. 그 문제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p. 132)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대단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론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 유명한 고전에는 재판에 대한 쌍방의 입장이 아닌 소크라테스의 일방적 입장만이 들어있기에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또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닌데, '악법도 법이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말한 적 없는데 등등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라고. 그러니 궁금해해야 하지 않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문제를 만들었을까, 도대체 누가 그런 소크라테스를 만들어냈을까.

이 오래된 고전들은 모두가 '편집된' 저작물이다. 편집의 원래 의미는 자료를 모아 좋은 것을 추려내여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편집자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 임의로 내용을 '누가'하거나 원래 문장을 '조금' 고치는 경우가 훨씬 더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인쇄술이 시작되기 전에는 베껴 쓰는 방식으로 책이 만들어졌다. 이른바 필사본이 그런 것이다. 필기도구가 원시적이었던 고대에 많은 글자를 정확하게 베껴 쓰는 일은 대단히 힘든 노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글자가 몇 자 빠지거나, 다른 글자를 써넣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절을 슬쩍 고치는 일은 자주 일어났다. 때로는 내용을 뭉텅이로 빼거나 넣기도 했다. (p. 141, 145)

플라톤이 만들어낸 소크라테스 관련 저작물 뿐만 아니라 공자의 <논어> 그리고 <성경> 또한 위와 같은 '편집된 고전'의 왜곡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오래된 고전들은 원래의 것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어쩌면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때마다 주류 이데올로기를 가진 편집자의 의도에 맞게 필요한 만큼 적당히 변형되어 오늘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변형시켜 살려낸 이들은 그 주인공을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그 성인의 입을 빌려 민중들에게 자신들의 도덕을 강요했던 것이다. (p. 146)' 라는 저자의 말은 지금껏 전해져 온 '고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하는 듯 하다. 원본이 없는 고전은 고전 그 하나만 읽어서는 곤란하다. 저자가 서두에서 말한 메타북의 중요성은 고전읽기에는 특히 더 필수적이다.

고전은 작품 그 자체보다 맥락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텍스트보다 그 해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저작물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전과 관련한 현대의 저작물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의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먼저 그 텍스트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쓰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p. 165) 그 당시의 언어를 느낄 수 있도록 역주가 자세히 달린 텍스트가 최선일 것이다. 또한 의역보다는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 좋은 면이 있다. 그래야 번역자의 주관을 최소화할 수 있을 테니까. (p. 168)

한글로 쓰이지 않은 책들을 번역본으로 읽으며 늘 고민스런 부분이긴 하지만 고전읽기에서는 누가 번역했는가가 더욱 상당히 중요하다. 제대로 된 번역본으로 고전을 읽으며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이 고전이 왜 살아남았을까, 누구의 의도로 어떤 목적에서 누구에게 읽히길 바라며 전해졌을까.

본성과 양육을 다루는 책들은 조심스럽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p. 193)

인간의 본성을 중시하면 우생학이 될 수 있고 인간의 양육을 중시하면 누군가의 의도대로 만들어지는 수동성에 천착하게 될 수 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어느쪽이든 위험하다. 본성과 양육에 대한 과학자들의 논리는 과학의 논리라기 보다 정치의 논리가 되기 일쑤 였다. 그 과정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책을 학살하는 큰 이유인 이 두 가지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책은 적의 상징물이었고, 피통치자에게 자기 권리를 깨치게 하는 것이어서 통치자에게는 성가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책은 통치자에게 더 잘 통치하기 위한 지혜를 주는 생명과 영혼의 샘물 같은 것이었고, 잘만 활용하면 피통치자를 길들이는 데에도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p. 306)

과거 역사에서 책이나 도서관은 지배권력층이 달라질때마다 번갈아가며 불살라지고 파괴되곤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값진 책과 문화재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던 것도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책이 값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도서관과 책은 파괴의 대상이면서도 약탈의 대상이었다. (p. 311)' 완전히 없어진 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책을 고전이라 부르며 우리가 그러한 책들에 대해 하고 있는 생각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데이터의 시대가 되었고 전자책이 흔해진 시대가 되었다고 해도 나는 종이책을 고집한다. 책이 주는 물성을 애정한다. 불태우자고 마음만 먹으면 종이만 불태워지겠는가? 데이터센터도 화재가 발생하면 기록들은 다 사라진다. 불태워짐과 사라짐은 종이냐 데이터냐 존재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내용들을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유지시키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고 '시간'이다. 과거에 비해서 다양한 정보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그 행운을 걷어차고 편협하고 왜곡된 정보만을 고집하려한다는 건 큰 어리석음일 것이다. 정보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이긴 하지만, 넘쳐나는 책들 속에 우리가 읽어야 하고 남겨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계속 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사명이자 의무이고 행복이자 행운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 책들이 우리의 '정신'을 바르게 해줄 테니 말이다.


책의 정신
강창래 / 북바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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